● Little Tokyo 

토플(TOEFL)을 토끼먹이정도로만 알고 뒷전에 미뤄둔 내게도 미국 땅을 밟게 될 기회가 생겼다. 할렐루야 태권도 선교단이 시범단을 구성해서 L.A를 가게 됐고 내가 거기에 낄 수 있었다.

처음 타본 비행기며 처음 본 미국은 신기하기만 했었다. 즐겁게 시범 일정을 마치고 L.A 다운타운에 있는 유명하다는 도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벽에 걸린 관장님 사진을 보니 어릴 적에 영화 포스터에서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다른 사진 중 늘씬하게 발차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 내가 제일 좋아하던 영화 ‘Best of the Best'의 주연 배우 필립 리 사범님이었다. 두 분 다 자리에 계시진 않았다.

대신 수업 중이던 사범님과 인사를 나누던 중 며칠 후에 리틀도쿄(Little Tokyo)라는 일본인타운에서 아시아 각계의 무술 고수들이 다 참여하는 시범경연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맛이 당겼지만 정해진 귀국 날짜 보다 이틀이나 더 있어야 그걸 볼 수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보고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귀국하는 날 아침 시범단의 대표되시는 분께 난 남았다가 따로 귀국하겠다고 했다. 이미 비행기표도 사흘 연기시켜 놓았다고 말하고 양해를 구했다. 수중에 돈이라고 50불이 전부였다. 시범 다니며 받아두었던 명함들을 보고 전화를 걸어 한 집에 신세를 지기로 했다. 시간이 남아 LA시내를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다니며 구경했다.

시범 날 리틀도쿄를 찾아갔다. 행사명은 팬암, 아시아 무술 페스티벌이었다. 행사장에 가보니 빼곡하게 천막들이 늘어서있고 각 문파들이 와서 진을 치고 있었다. 중국의 쿵후 팀들과 일본의 무술들이 주를 이루었고 그 외 남방 아시아계 무술들도 있었다. 처음 보는 무술이며 예리한 기합들... 역시 세상은 넓고 무도는 끝이 없구나!

태권도는 단 한 팀만 초청 되어있었다. 예사 자리가 아니었다. 각 팀마다 보이지 않는 시선들이 예리하게 다른 팀을 주시하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실력이 밀린다 싶으면 끌끌 혀를 차는 분위기였다. 구경하려고 온 나에게 사범님이 나도 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셨다. 이런 자리에 설 수만 있다면야 영광이다.

이 도장 시범단 수준도 상당했다. 초단을 따는 데만 5년이 걸리는 도장이니 실력들이 흠잡을 데 없었다. 도복을 갈아입고 같이 몸을 풀고 있는데 한 어른이 오시더니 이 자리가 어떤 자린데 다른 도장 사람을 함부로 끼워 주냐며 사범님을 나무라신다. 속으로 서운했지만 행여 폐가 될까 빠지겠다고 했다. 이 사범은 한국서 다니러 왔고 내일 가니 신경 쓰지 마시라고 만류하는 덕분에 끼게 되었다.

마침내 우리 순서가 되고 다들 시범을 멋지게 해냈다. 역시 뛰어 차고 이어 차며 송판을 부숴 나가는 빠르고 강력한 발차기는 어느 무술도 우릴 따라 오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은 손끝 찌르기로 세 장의 송판을 격파하는 걸로 내가 마무리하기로 했다. 손끝을 길게 뻗어 조준했다. 미국 송판은 좀 더 두껍다. 하지만 손가락이 부러지면 부러졌지 물러 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외여서 다소 소란한 분위기였는데 일 순 정적이 감돌았다. 내가 낼 수 있는 최고의 기합을 내며 한 걸음 들어가며 찔렀다. “이야아~앗!” 뻑! 소리를 내며 송판들이 갈라지고 내 손은 보조자의 가슴에 닿아 있었다. 순간 사방에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당시 손끝 격파는 흔한 시범이 아니었나 보다. 다른 문파에서도 ‘저 놈이?’ 하는 눈치였다.

시범이 끝나자 영화배우 같이 생긴 아가씨가 달려와 손 좀 만져봐도 되냐며 이리 만지고 저리 만지며 좋아했다. 오늘은 밥 값 했다 싶어 내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그 뒤로 손끝 격파는 미국 시범에서 빠지지 않는 감초가 되어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 했다.

● 아틀란타 올림픽 

이듬해인 96년 아틀란타 올림픽 때에 맞추어 태권도 시범단이 구성되었다. 미국과 인연이 있으려고 했는지 가기로 한 사람들 중 비자를 못 받은 사람들이 생겨 자리 메우기로 비자가 있던 내가 또 끼게 되었다. 부푼 기대와 달리 처음 본 미국만은 못했다. 미 서부의 영화 같은 경치를 보던 것과 다르게 동부인 아틀란타는 상당히 현실적인 분위기였다. 게다가 기후나 경치도 한국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올림픽이 치루어 지던 아틀란타는 심지어 그곳 주민들조차 언제가 개막식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메인 스타디움이 있는 다운타운을 제외하곤 아무런 올림픽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각국 문화 행사가 벌어지던 올림픽 파크에는 섬뜩 할 정도로 중무장한 경찰병력들이 쫙 깔려 위압감을 주고 있어 축제분위기가 위축되어 있었다. 실패한 올림픽이라는 악평을 들을 만 했다.

올림픽 파크에서 길거리 시범을 하려던 우리 시도도 경찰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올림픽기간 중엔 어떠한 단체행동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경찰 하나는 우리가 기습적인 시범을 할까봐 졸졸 따라 다니는데 여차하면 수갑 채우겠다는 식이었다.

때마침 전국 TV네트워크인 abc 방송 리포터가 도복을 입고 몰려다니는 우릴 보더니 생방송에 시범 하나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경찰이 안된다고 한다니까 리포터가 경찰을 붙잡고 사정을 했다. 격파 하나만 하기로 허락을 받았다.

마침내 큐 싸인이 들어오고 메인 스튜디오에서 올림픽 현장을 연결한다며 우리 쪽으로 화면이 돌아왔다. 태권도 한마당 장년부 우승자였던 관장님이 짧은 기합과 함께 360도 뒤로 돌며 풍선 두 개를 터뜨리는 시범을 보였다. 팡! 소리를 내며 풍선이 터지자 주위에 벌떼 같이 모여든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바로 리포터가 축제 분위기를 전하며 약 5분간 생방송이 진행되었다.

방송이 끝나자 우리를 쫓아다니던 경찰도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등 태도가 바뀌었다. 이때다 싶어 소란 안 피울 테니 시범 한 번만 하자고 했다. 처음엔 미안하지만 안된다는 식이더니 동료 경찰들과 상의를 하고는 그럼 자기들이 지켜 줄 테니까 잠깐만 하라는 것이다. 우리를 감시하던 경찰들이 도리어 둥그렇게 둘러싸고 즉석 무대를 만들어 주어 호위를 해주는 덕분에 시범을 했다.

각국에서 온 관람객들이 환호하며 좋아했다. 모처럼 제대로 된 축제 분위기가 났던 것이었다. 시범 후엔 자기나라 기념품이라며 작은 배지나 소품을 하나씩 우리에게 건네주어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 바로 그 곳에서 폭탄 테러 사건이 발생해서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방송에서 폭발 현장을 보여주는데 나도 서있던 장소였다. 행여 나한테도 있을 수 있었던 일이구나 생각하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 다음호에 계속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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