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붙게 되면 앞차기든 뒤차기든 짧고 강한 걸로 급소를 노려 목숨 걸고 한방 날려보자 싶었다. 제2의 선택으로 손끝 찌르기로 숨통을 생각해 두었다. 송판 뚫듯이 찌르면 숨통이 뜯겨 나갈 수도 있다. 그러니 칼 든 놈이나 나나 어차피 한방에 죽고 사는 싸움이었다.

이정규 사범이 뒤차기로 블럭 격파 시범을 보이고 있다.

“뭐해? 너 칼 들었잖아 빨리 나와! 칼 든 놈 잡고 정당방위였다고 하게!” 내가 너무 길길이 날뛰니까 스캇이 되려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너 오늘 이 동네 살아서 못나가!” 칼을 휘두르며 위협이다. “걱정마 새꺄! 난 죽어도 아무도 상관 안 해! 덤비기나 해!” 이쯤 되니 저 놈, 진짜 고수인가? 하는 눈빛이었다.

둘러선 관객들에게 은근한 도움을 청했다. “니들은 친구가 싸운다는데 보고만 있냐?” 하지만 평상시와 다르게 아무도 끼려고 하지 않았다. 보고만 있는 것이 내가 이길거라는 쪽에 기대를 걸고 뭔가 멋진 장면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되레 “붙어봐, 넌 칼도 들었잖아!”하며 싸움을 추켜세우고 있었다. 스캇이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무술한 사람들은 자제력이 있다던데 넌 그렇게 흥분 하냐?”

“먼저 성질 건드린 게 어떤 놈인데! 왜? 겁나냐? O.K! 그래 그럼 죽이진 않고 다리든 하나만 부러뜨려 줄 테니까 나와 임마!” 스캇 눈에 공포가 비쳤다.

다들 붙어보라는 아우성뿐이었고 나도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자칫 피바다 될 판이었다. 그때 가게 주인어른이 난리났다는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오셨다.

“이 사범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동네에서 사고 치면 우리 큰일나. 참고 가게. 부탁일세.” 주인어른이 날 몰아냈다. 등 떠밀려 가며 소리쳤다. “아~ 오늘은 그냥 못 갑니다!” 구경거리 놓친 관객들의 아우성. “그냥 둬라. 싸우게!”

그날은 그렇게 일단락 되고 정신이 들자 다음날이 걱정되었다. 오늘 다시 붙어보자면 어쩌나. 긴장을 잔뜩 한 채 가게문을 들어서는데 스캇이 나를 보고 흠�� 놀란다. 일부러 시선 안주고 모른 체 하고 있는데 녀석이 푸짐하게 닭고기를 넣은 치킨 샌드위치를 들고 와서 어제는 미안하게 됐다고 먼저 사과를 한다.

나도 잘되었다 싶어 사과를 했다. 어젠 무도인 답지 않게 이성을 잃어서 미안하게 됐다. 같이 일하는 처지에 앞으론 그러지 말자. 화해의 뜻으로 악수를 하고 웃어 주고는 녀석의 기름때 낀 손으로 만든 치킨 샌드위치를 받아먹었다. 생각 밖으로 무척 맛있었다.

그 일 이후 일하기가 두루두루 편해졌다. 그 놈 진짜 태권도 한 놈인가 보더라. 건드려 봐야 손해다라고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가끔씩 닭 가슴살을 듬뿍 발라 만들어 주었던 스캇의 치킨 샌드위치가 그리울 때가 있다.

아쉬운 건 그 친구의 샌드위치를 다시 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 일 얼마 후 인근 다운타운에서 빌딩 해체 공사 일을 하던 중 벽이 무너져 압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슴이 허전하고 아팠다. 젊은 사람도 그렇게 확 가버릴 수가 있구나 싶어 산다는 게 허망한 생각이 들었다.

● 담배내기 

못 보던 녀석인데 담배를 사러 왔다. 울퉁불퉁한 근육에 멋지게 새겨 넣은 문신들. 길게 땋아 내린 머리며 수염이 당차 보였다. 감옥 갔다 왔나? 이 동네에선 안보이면 십중팔구 감옥에 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뒤춤에서 칼을 뽑더니 계산대를 탁 내리 찍는 게 아닌가.

“야, 나 담배 필요해!” 낮게 까는 목소리와 치켜 뜬눈이 시비조다. 나도 눈치가 늘었다. 지면 계속 당한다. 주위에 선 녀석들이 낄낄거린다. 담배를 꺼내 탁 내려놓으며 녀석의 칼 위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그러냐? 난 돈이 필요해!” 기가 차다는 듯이 한동안 나를 째려보더니 “얼만데?” 그러곤 돈을 내놓는다.

뒤에 서 있던 녀석들이 이 녀석의 뒤통수를 치고 막 웃는다. 나도 같이 웃는다. 녀석만 영문도 모르고 바보 됐다.

● 대답은 짧게 

태권도를 했다니 꼭 이렇게 묻는다. 너 맨손으로 사람 죽일 수 있냐? 못한다 그러면 실력 없다할 것이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럴려고 태권도 배우냐며 돼먹지 못했다고 양아치 취급할게 뻔하다. 그럴 때면 진지하게 답변을 했다. I don't want to.(그러고 싶지 않다) 이 말 한마디에 움찔하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실력은 있지만 참는다는 뜻이다. 짧은 영어가 때에 따라선 보약이다.

● 주먹 단련 

흑인옷 가게에서 일할 때이다. 같이 일하는 흑인 점원들이 있었지만 누가 물건에 손을 대도 모르는 체 하는 경우가 있었다. 어쩌다 그걸 보고 따지면 자기들도 어쩔 수 없단다. 일 끝나고 돌아가는 곳이 흑인촌인데 가다가 만나면 같은 흑인끼리 안 돕고 고자질했다고 해코지 당할 수도 있단다.

그러니 물건에 손대는 건 나보고 잡으란다. 그렇다고 이 친구들이 힘이 없는 게 아니다. 농구 할 때 백 덩크 슛을 텀벙텀벙 넣는다. 힘이며 스피드, 점프, 발놀림이 귀신같다. 장난 삼아 가르친 앞차기가 살인적인 파워로 허공을 가른다. 틈만 나면 50파운드나 나가는 덤벨을 한 손으로 들었다 놨다를 몇 십 번씩 한다. 나보고 해 보라지만 몇 번도 어려웠다.

사방이 꽉 막힌 옷가게 안에서만 12시간씩 서서 일하다 보면 몸이 망가지는 느낌이 든다. 지쳐서 운동이란 걸 할 기운이 없었다. 그나마 내가 짬 내어 할 수 있는 게 주먹단련이었다. 가게 안을 오가며 시간이 나면 나무 몽둥이로 주먹머리를 계속 때렸다. 그걸 보고 그 친구들도 신기한지 따라해 본다.

단련도 안된 맨 주먹머리에 몽둥이질 몇 번해 보면 뼈까지 저리고 피부가 벗겨지기도 한다. 몇 번 따라하곤 죽는다고 엄살이다. 그러니 힘 좋은 녀석들 기죽이는데는 이 방법이 제일이었다. 게다가 빨간 벽돌을 주먹으로 때려 박살내느 내 사진을 보았다. 벽돌이 파편이 되어 튀는 그림을 보고 자기 머리통이 깨져 날아가는 상상들을 한다.

나른한 오후 관상이 딱 ‘소도둑놈’인 녀석이 들어왔다. 주먹머리를 때려가며 졸음을 �i고 있었다. 보통은 손님에게 혐오감을 줄까봐 얼른 감추곤 했는데 그날은 그러지를 못했나 보다. 손님이 같이 일하는 샨이란 친구에게로 다가가서 뭐라고 몇마디 주고받더니 나를 흘깃 쳐다보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냥 나간다. “왜? 맞는 싸이즈가 없어?”

샨이 귀찮다는 듯이 대답을 했다. “아니, 나보고 물건 좀 집어 갈 건데 모른 척 하래, 그래서 난 괜찮은데 쟤 보이지? 몽둥이로 두 시간째 저러고 지 주먹 내리치고 있어. 재한테 얘기해 봐. 그랬더니 그냥 가더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 소도둑놈 다시 오면 망치로 종목을 바꿔야지. 꽝꽝꽝! 옷에 손만 대봐라! 망치로 한 방 때려 준다.

이정규 사범  wtkd@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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