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린부르크. 도시 이름인데 뉘앙스가 여성적이다.

러시아 역사상 두 명의 ‘예카테리나’라는 여성이 유명하다고 한다. 한 사람은 가장 훌륭한 통치자로 평가되는 피터대제(大帝)의 왕비였다가 남편의 사후, 타의에 의해 제위에 올랐으나 아무 실권이 없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 자신이 정상의 자리를 쟁취하였고 치세도 잘한 유명한 황제였다. 

중국의 유일한 여자 황제 측천무후는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으나 러시아의 여제(女帝) 예카테리나는 정치를 잘 해서 당시에는 물론 긴 세월 동안 러시아 국민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두 번째 시범을 했던 곳이 바로 예카테린부르크였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필자는 호기심이 발동하여 몇 사람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두 명의 예카테리나 중에서 누구의 이미지를 받아들여 도시 이름을 그렇게 지었느냐”고. “그야 당연히 유능한 여제의 이미지를 받아들였을 것이다”는 게 한결같은 답변이었다.

예카테린부르크에서의 시범 역시 성공적이었다. 24개의 프로그램이 모두 깔끔하게 펼쳐져 갈채를 받았다. 마지막 순서인 남승현 감독의 ‘장애물 딛고 뛰어올라 공중 몸돌아 앞차기’도 단번에 성공했다.

시범 자체에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예카테린부르크 태권도협회의 요청에 의해 중간에 삽입된 겨루기가 문제를 일으켰다.

당초 ‘3개 체급에 걸쳐서 2회전씩 친선경기로 하자’고 합의했으나 실제 상황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겨루기가 무엇인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벌이는 싸움이 아닌가. 거기에 무슨 친선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노보시비르스크에서도 친선 겨루기는 치러졌다. 우리 시범단 대표로는 임은호 5단(사진)과 이정만 4단이 출전하여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전문적인 겨루기 선수 출신인 임 5단은 수준높은 기량을 과시하며 완승을 거두었다. 시범단 중 가장 겨루기에 능한 서의성 5단이 임 5단의 세컨드를 맡아 휴식시간에 주의사항을 전달하고 있다. 여기서는 좋았으나 다음 도시인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첫 경기에 나선 이용주 5단은 역시 테크니션답게 공격을 계속 성공시켰다. 그러나 기술을 다양하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연속 나래차기 등 힘든 기술을 잇달아 구사하다 자꾸 넘어지는 바람에 감점을 당해 6대4로 조금 리드한 채 2회전을 마쳤다.

이 대목에서 현지 협회의 페트로비치 회장이 엇비슷한 스코어에 고무되어 흥분한 나머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3회전까지 해보자고 진행을 맡은 자기네 협회 임원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남승현 감독이 강력하게 항의했으나 설왕설래 끝에 경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3회전 경기 도중 이용주 5단이 어려운 기술을 사용하다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무릎과 발목을 다친 것이었다.

현지 협회의 입장이나 기분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기술이 뛰어난 태권도 종주국 선수들을 이긴다면 이만저만 신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협회의 체면도 살고 향후 업무추진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체면 구기고 부상까지 당한 종주국 선수는 어찌 되는가. 이번에는 우리 측이 흥분했다. 남 감독의 항의로 겨루기는 중단되고 시범이 계속됐다. 다행히 잘 끝나기는 했으나 기분은 매우 떨떠름했다.

시범단 운영과 관련, 해외에 파견할 때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겨루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겨도 좋은 소리 못 듣고 지면 아주 망신스럽기 때문이며 아무리 잘 하는 선수라도 상대방이 죽기살기로 덤비면 정강이 뼈 등에 상처를 입을 확률이 높기 마련이다. 만일 겨루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예상된다면 겨루기 전문 선수를 별도로 데리고 가야 된다.

둘째, 파견국의 협회와 사전에 완벽한 협의를 마쳐야 한다. 숙소, 수송방법, 통역, 시범장소, 내용 등을 아주 세밀하게 상의하고 이를 미리 확정지어야 한다.

셋째, 우리 선수들이 평소 훈련에서 겨루기를 조금씩 연습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나는 시범전문이니 겨루기는 못 한다”고 꼬리를 내리겠는가. 어느 정도는 겨루기도 잘 할 수 있어야 된다.

넷째, 팀 닥터 제도의 도입이다. 선수들 모두가 한결같이 바라는 부분이다. 러시아에 도착한 다음날 연습 중에 김기수 4단이 심하게 어깨를 다쳤다. 본인의 말로는 ‘어깨가 빠졌다’고 했다. 그날 이후 그는 오른손을 거의 쓰지 못했고 그런 상황에서도 맡은 프로그램은 잘 감당해 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다섯째, 격파물인 송판에 관해 다양한 연구와 실험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가 직접 나서 추진해 볼 작정이다. 이미 체육과학연구원에 의뢰를 해놓은 상태.

여섯째, 선수들에게 합당한 보상을 해주어야 한다. 정기적으로 연습을 해야 하고 가끔 다치기도 하는 선수들을 그냥 부려먹어서는 안 된다는 게 필자만의 생각일까.  

최창신 상임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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