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지적한 바와 같이 9.11사태 이후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성(城)에 들어가는 것은 수월하지 않았다.

40년 가까운 지난 세월, 미국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불편을 겪은 적이 없기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7월 15일 로스앤젤레스행 대한항공 017편에 몸을 실었다.

최창신 상임고문.

그러나 기내에서 승무원들이 미리 작성해 두라고 나누어 주는 ‘세관신고서’와 ‘출입국신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조금 켕기는 것이었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있을 곳의 주소를 적는 난이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에도 신고서에 주소를 적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에는 엄격하지 않았다. 아무 호텔이나 이름만 적어 놓으면 그냥 통과되었다.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주소를 적으라면서 무슨 주, 무슨 시, 어느 지역 몇 번지까지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기재하라고 강조해 두고 있었다. 그러니 찜찜할 수밖에. 내가 묵을 호텔의 주소는커녕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대회조직위 관계자들이 마중 나와 픽업하게 되어 있었기에 그런 걸 굳이 알아둘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내심 켕기고 우려되었던 일은 LA의 톰 브래들리 국제공항 입국심사장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길게 늘어선 줄을 따라 제법 오래 기다린 끝에 출입국관리소 직원 앞에 섰으나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국을 허용하는 스탬프를 찍어주지 않았다.

나는 무엇 하는 사람이며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미국 내의 숙소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모를 뿐 이미 예약이 되어 있으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조리있게 설명했다. 그래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별수 없이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주소의 기재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나의 방문 목적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친구의 집 주소를 댈 수는 있다. 그렇게라도 인정해 주겠는가?” 그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더니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쪽 데스크에 가서 정리해 오라고 했다.

그게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면 그 자리에서 쓰게 해도 될 텐데 굳이 왔던 길을 되짚어 올라가게 해서 힘들게 하는가.

그 유명한 미국의 상징 프라그마티즘(실용주의)은 자기네끼리만 통용되는 배타적인 것인가. 하라는 대로 해야지 별수 있나. 길게 늘어서 있는 사람들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꾸만 불쾌해지는 마음을 전 부통령 고어와 하원의원 존 딩겔의 일화가 달래주고 있었다.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한창 펼쳐지던 2002년 6월, 전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워싱턴DC 근처의 레이건공항에서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밀워키행 비행기를 타려던 그를 ‘특별검색대상’이라며 공항 보안요원이 다른 장소로 데려가더니 짐을 샅샅이 뒤지는 것이었다. 고어를 알아본 다른 승객들이 모두 깜짝 놀랐고 대부분 휴대전화로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그 해프닝을 알려 주기도 했다.

밀워키에서 전당대회를 마친 고어는 다음날 오후 그곳을 떠날 때 어찌된 일인지 또 공항에서 같은 일을 당했다. 이번에도 보안요원의 지시를 잘 따랐다.

그가 이틀 동안 두 차례나 특별검색을 받아야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규정에 따라 공항에서 무작위로 선정하는 검색대상에 뽑혔을 뿐이었다. 나중에 기자들이 그에게 소감을 물었다. “안전을 위해 협조하는 건 당연하다.” 그의 담담한 답변이었다.

존 딩겔이라는 연방 하원의원이 있다. 민주당 소속으로 75세의 중진 의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고어보다 더 황당한 수모를 당해야 했다. 레이건공항에서 그는 금속탐지기를 통과할 때 경고음이 울렸다는 이유로 바지까지 벗어야 하는 험한 꼴을 겪었던 것이다.

“20년 전 낙마사고를 당해 무릎과 엉덩이에 금속 핀을 박았다”고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원들은 그를 팬티만 걸치게 한 다음 철저하게 조사했다.

언론의 질문이 쏟아졌다. 딩겔은 대변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공항이 의원의 옷을 벗길 정도로 안전에 신경을 쓰는 건 좋은 일이다.”

두 정치인의 멋진 에피소드를 생각하며 출입국관리소 직원이 지정해 준 데스크에 가서 다시 사정 이야기를 한 다음 친구의 집 주소를 기재하여 약간의 곡절을 겪은 다음 입국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이상철 조직위원장을 비롯, 의외로 많은 관계자들이 마중나와 주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민주국가, 법치주의라는 개념에서 우리나라와 미국의 차이를 절감하며 너무도 가슴 아팠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신문의 독자들만큼은 미국에 갈 때 꼭 체류지의 주소를 적어 가서 나처럼 곤란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알려 드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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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신

1960년대 선수생활을 했던 정통 태권도인.

체육부(현 문화관광체육부) 대변인을 거쳐 체육과학국장·체육지도국장으로 서울올림픽 대비 종합전략을 기획, 한국의 4위 달성에 기여했으며 축구협회 수석부회장, 문화체육부 차관보, 2002월드컵조직위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본사 상임고문, 국기원 상임이사

최창신 고문  tkdnew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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